좋은 번역이란 두 언어의 구조적 차이를 반영하라
번역 강의를 하다 보면 초반에는 많은 학생들이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영한번역’을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는 ‘한영 번역’보다 훨씬 수월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업이 계속될수록 영한 번역이 더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처럼 실제로 부딪혀 보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 하기보다 듣기가 더 어렵고 동시통역보다는 청중을 향해 통역하는 순차통역이 더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번역하려는 텍스트에서 모르는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아무리 봐도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고 고민합니다. 막연히 영한 번역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영한 번역을 의뢰하는 텍스트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복병이 아주 많습니다. 쉬운 텍스트를 번역 의뢰하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영한 번역을 의뢰하는 경우는 다음의 두 가지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첫 번째는 번역 분량이 많은 경우입니다. 요즘은 적은 분량의 영한 번역은 회사나 조직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처음 통번역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작업을 위해 만난 사람들의 토익 실력이 700점이면 잘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900점이 넘는 것은 기본이고 만점에 가까운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체적으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량인 경우에만 번역을 의뢰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텍스트가 까다롭거나 어려운 경우입니다. 특히 전문 분야, S/W 등 기술 관련 분야, 계약서, 협의서 등은 메일 송신을 하지 않고 파우치 형태로 국내외로 이동되는 경우가 많아 부피를 줄이기 위해 글자 크기가 6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페이지를 번역하고 나면 분량과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번역이 정신노동인지, 육체노동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입니다. 또 행간도 좁아서 자칫하면 한 줄을 건너뛰고 번역할 위험도 큽니다.
‘FTA 협정문 오역’이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그 역시 이런 문서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협상에 참여했던 담당자들이 번역에도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역사 개인의 배경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교부뿐 아니라 협상에 참여한 각 부서의 담당자들도 번역 과정에 참여하여 번역 내용을 한 번씩이라도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담당자들이 협상 후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많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편 번역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사항은 클라이언트(번역 의뢰인)의 번역물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클라이언트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입니다. 따라서 번역을 할 때는 그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들에 주의하면서 번역하고 반드시 최종 확인을 해야 합니다. 특히 요즈음에는 과거에 전문 지식에 속했던 내용이 일반인을 위한 책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번역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는 그 분야 전공자도 번역하기가 까다롭다고 합니다.
번역을 하는 동안 제가 의도적으로 자주 되새기는 조훈현 국수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수였을 때 가끔 국수들이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것을 보며 어떻게 저런 터무니없는 실수를 할까 의아해했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국수가 되고 나서 보니 똑 같은 실수를 하고 있더랍니다. 결국 초발심의 문제입니다. 익숙하다고 방심하면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번역할 원문은 가진 게 많습니다. 다의어, 속담이나 관용 표현, 그리고 그 언어권에서만 쓰이는 고유명사(인명, 지명, 기관명) 등 번역의 위험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역사가 번역을 잘하려면 다문화 가정의 문화 충돌만큼이나 많은 충돌을 통해 다양한 배경지식을 학습하고 이해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원문이 가지고 있는 여러 위험 요소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계별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운전을 처음 배울 때 정석으로 배운 사람은 평생 정석으로 운전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평생 위험한 운전 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번역도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어와 우리말은 그 구조가 다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번역할 때 원문의 문장구조에서 벗어나 우리말 구조로 번역해야 독자에게 의미가 잘 전달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번역을 시켜 보면 원문의 주어, 서술어, 목적어를 그대로 주어, 서술어, 목적어로 번역합니다. 당연히 의미 전달에 지장이 생깁니다. 원문과는 다른 우리말 구조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학습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일례로 구글에서 제공하는 영한 번역 서비스를 이용해 보면,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번역을 볼 수 있습니다. 영어가 한글로 글자만 바뀌었을 뿐 문장구조는 영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출처]:[번역, 이럴 땐 이렇게][이다새][조원미 지음][Page.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