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종류와 번역가의 덕목
번역을 주 수입원으로 삼은 지 칠 개월이 되었다. 보고서로든 강의로든 내 언어로 내 양심을 걸고 이야기하는 일이 힘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의 사상과 언어에 기댈 수 있는 번역이 다음 직업으로 조금은 낫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년 삼 개월 전 일이다. 십 년도 더 전에 우연찮은 기회로 맛본 번역이라는 일이 그렇게 나의 직업이 되었다. 아직 번역이 무엇인지 말할 계제는 못 되는 짧은 경험이지만, 다행히도 요 몇 달 간은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거의 매일 적어도 몇 분씩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업을 통해 주어졌기에, 생각이 더 방만해지기 전에 한 차례 정리해 보려고 한다. 비교의 수위가 잘 들어맞지는 않지만, 수업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문학 번역과 요사이 주로 하고 있는 문서 번역이 어떻게 다르며, 그러나 또한 어떠한 공통된 덕목과 자질이 번역가에게 요구되는지에 초점을 둘 것이다.
우선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기술 번역’이라는 용어를 대신하여 이 글에서는 ‘문서 번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임을 밝혀 둔다. 출판 번역이나 영상 번역이 아닌 모든 번역을 기술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이나, 이 용어는 보통 사람들에게 전자 기기 매뉴얼 번역 정도를 연상케 하는, 협의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음식 서비스업자에게 제공될 호주의 어느 주정부 식품안전청 ‘생계란 취급 안내서’, 카이로프랙틱 치료용 테이블 사용 설명서, 미국의 한 소도시 관광 안내 브로슈어, 국내에 지사를 둔 다국적 기업의 회사 차량 운행 지침, 중동 지역에 위치한 자원 개발 회사에서 한국의 투자자에게 보내온 공문서, 헝가리의 고급 수제 비누 제품 설명서, 퍼스널 트레이너를 위한 운동생리학 교육 자료,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으며 오해의 소지가 없고 출판 번역과도 구분할 수 있는 용어는 ‘문서 번역’이다.
어떠한 번역을 할 때에든 번역가는 숙명적으로 우리말의 첨병이다. 번역을 할 때에는 애초에 우리말로 글을 쓸 때에 비해 바르지 않거나 우리말답지 않은 표현과 문장을 구사할 위험에 더욱 자주 직면하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바른 우리말을 사용하는 일은 어렵지만 더 중요하다. 단, 문서 번역은 대체로 독자가 일반 대중이 아니라 훨씬 더 특정적이므로, 그의 입장에서 잘 읽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바른 우리말을 쓰는 것만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공항의 항공기 계류장 안전 수칙을 번역한다면 계류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와 그 외의 노동자들이 가진 배경 지식과 교육 수준 등을 최선을 다해 상상하여 그에 맞는 전문 용어와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 십만 원이 넘는 명품 황사 마스크 광고물을 읽을 잠재 고객은 누구일까, 이 계약서는 회사 담당자만 읽을까 아니면 변호사에게까지 가게 될까. 즉, 한국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우리말로 쓰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의 언어, 그들이 사용하는 우리말로 옮겨 주어야 하는 것이며, 문학 번역을 할 때와 원칙은 같다 하더라도 그 범위가 훨씬 좁아지고, 따라서 때로는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말을 불가피하게 벗어나야 할 수도 있다.
문학 번역에서는 번역가의 역할이 언어적 영역 내에서 극대화되는 반면, 문서 번역에서는 순수하게 언어적인 역할은 조금 줄어들고 대신에 그 외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차이점이다. 같은 계약서라 할지라도 아직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안을 검토하는 단계인지, 이미 체결된 몇 해 전의 계약서인데 어떤 이유에서든 다시 검토하기 위해 번역하는 것인지에 따라 번역가가 취해야 할 입장이 달라진다. 특히 전자의 경우 번역가는 의도치 않게 그 문서를 사용하는 어느 담당자나 승인권자보다도 꼼꼼하게 계약서 초안을 검토하게 된다. 출판 번역의 경우 편집자와 번역가가 출판 전에 충분한 협의를 거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반면 문서 번역을 하면서 에이전시 측 담당자와 통화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다. 번역가는 “7.2 ‘양 당사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기밀 정보에 접근하지 않도록 제한하여야 한다.’ 번역하면 이렇게 되나, 문맥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람만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제한하여야 한다’고 쓰여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직역하였으니 검토 바랍니다.”와 같은 주석을 달아서 원고를 송부하고, 담당자는 번역가의 의견을 고객사에게 전달하기에 앞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문서 번역에서 요구되는 순발력은 출판 번역, 특히 문학 번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할 것이다. 문학 작품을 대하는 번역가는 진득하게 시간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선배가 쓴 <칼의 노래> 첫 문장이다.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를 놓고 그는 몇날며칠을 고민했다고 했다. 조사 ‘한 글자’뿐이지만, ‘하늘과 땅’ 차이라고 했다.”(정혁준,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라”. <한국기자협회보> 웹사이트 2016. 4. 6.) 문학 작품을 번역할 때 이러한 고민은 매 순간 거듭될 것이다. 헝가리산 비누 카탈로그에 이런 글귀가 있으면 문서 번역가도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SILVER MIRROR OF HEAVEN, SILVER MIRROR OF HEAVEN, YOU BEAUTIFUL SILENT LAKE! THE MOON IS WISTFULLY LOOKING AT HIS FACE; OVER TIHANY, IT PULLS ITS STARRY VEIL. (은빛 거울에 비친 하늘, 은빛 거울에 비친 천국, 아름답고 고요한 호수여! 티하니 마을 너머에서 떠오른 달은 호수를 시샘하여 별빛 반짝이는 베일을 거두고.)”
그러나 문서 번역가에게 일반적으로 이런 고민은 사치다. (그리고 사실 위 문구에서 베일을 벗는다고 쓰든 거둔다고 쓰든 비누 판매량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다.) 번역가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업무 프로세스의 불합리함 때문만은 아니다. 문서 번역이 가지는 본연의 속성상 촉각을 다투는 일일 때가 많기 때문에 어떠한 문체와 표현, 어휘를 사용할 것인지를 신속하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대체로 최대 한 페이지를 번역하기 전에 파악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모호한 부분에서는 적절한 표현을 찾는 것보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고, 그 문서의 의도와 내용에 그 모호함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빠르게 판단하여 직역을 할 것인지 의역을 할 것인지, 또는 모호하다는 언급을 덧붙여 회신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와 달리 문학 번역가는 섬세한 표현에 시간을 들이는 데에서 재미를 느낄 줄 알아야 하며 모호할수록 더욱 집요해지는 끈기가 필요하다.
전반적으로, 문학 번역에서는 번역가의 첫 번째 덕목인 역지사지의 역량을 발휘할 때 그 방향을 저자에게 더 기울여야 한다. 저자가 하려는 말을 파악하는 데에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한다. 당연히 독자의 입장에서 번역해야 하지만, 문학의 독자는 대체로 나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내가 속한 집단이 잠재적 독자 집단이라고 보아도 얼추 비슷할 수 있다. 반면에 문서 번역에서는 독자가 더 한정적이고 그 독자는 내가 전혀 접해 보지 못한, 나와 먼 거리의 사람일 수 있으므로, 문학 작품을 번역할 때보다 독자의 입장에 서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가는 모든 번역에 자존심을 걸어야 한다. 자존심이란 지지난 해에 내가 이제 다시는 나의 직업에서 걸지 않으려 했던 ‘양심’의 다른 얼굴이므로, 나는 결국 같은 문제에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내 문장을 쓰지 않으려 하였으나 다시금 내 문장을 쓰고 있게 된 것일까? 그러나 내가 오래전에 가졌던 꿈 중 하나인 ‘작가’로서의 번역가가 된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번역가라는 직업에서 떠오르는 ‘작가’로서의 이미지는 출판 번역, 특히 그 중에서도 문학 번역 영역에 한정되어 있고, 어쩌면 번역의 백미가 문학 번역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번역가가 작가, 즉 창작자로서 언어를 다루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번역에서든 공통적으로 번역가가 지켜야 할 덕목과 가치가 있으며, 영역에 따라 추구해야 할 또 다른 이상도 있는 것이어서, 출판 번역의 기회가 없거나 그만한 역량이 안 되어 문서 번역을 한다는 식의 대우나 인식은 옳지 않다. “원래는 책 번역을 하고 싶었는데, 초보다 보니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계약서·매뉴얼·서신 같은 단순한 번역 작업을 하다가...” 한 영상 번역가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데드풀’ 황석희 번역가 인터뷰”, <텐아시아> 웹사이트 2016. 3. 2.) . 문서 번역에 관한 우리 모두의 인식을 보여준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은 여기에는 또 다른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일에 나의 자존심을 건다.
출처 : www.facebook.com/clahobbyist/posts/990243327689502
2016년 4월 27일 김보영 선생님! 페이스북에서 퍼 왔습니다.^*^